
"일련번호, 코드, 탭, 보증서와 인보이스"
가품이 차고 차는 서울에서 코 베이지 말라고 비계를 놓아준다. 아이러니한 건, 존재 자체로 떳떳한 정품이 주저리 증거를 들이밀며 정품임을 증명하는 꼬라지다. 정품이 아레테를 전부 발휘한다면 그 이상으로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제아무리 가품이 날고 기는 상황이라고 할지언정 정품은 정품 그 자체다. 진짜라니까, 굳이 참을 증명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영가설을 부정하면서 대립가설을 채택하는 수고.
수고스러움이 또 다른 수고스러움을 낳는다.
정품의 수고스러운 증명이 이어진다한들 또 당하고 사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지식인 절대신 '코비진스' 옹은 쉴 새가 없다. 그는 지식인의 현자다. 기가 막힌 정품 판별사. 빼곡하게 달린 네이버 지식인 질문 목록을 훑으며 정, 가품을 확인해준다. 다음부턴 정품 사이트를 이용하라고 처방해주는 모습은 가품에 속은 걸 타박상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한다는 담론을 넘어서.
대비 접근은 가치 판단으로 이어지면서 '저건 착하다, 저건 나쁘다'는 줄기를 만들어낸다. '참'에 대한 담론과 고전들이 수를 놓아도 여전히 현실에는 가짜들이 많고, 그 속에서 진짜라고 증명하는 내러티브가 판을 친다. 진짜 행복, 진짜 즐거움, 진짜 사랑, 진짜 영화, 진짜 음악. 악성 루머에 맞서 딱 5분간 보여주겠다는 한 전설의 기자회견이 생각난다.
설령 전설이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들, 곧이 곧대로 믿었을까?
"초등학생한테 지점토만 줘도 만들 조형물이겠다" 짓껄이며 히죽거리는 족속들이 그려진다. 왓X컴즈 마냥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깐죽대며 변태같은 희열을 느끼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좌우지간, 참과 거짓의 끊임 없는 굴레 속에서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진짜와 가짜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이 자빠지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걸 종종 지켜봤다. 더군다나 진짜라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가여이 여겨 지켜볼 여력도 없다. 내겐 할 일이 있고 이것이 내 삶 전반을 관통한다. 어차피 증명해줄 이는 따로 있을 것이다. 난 이제 진짜고, 가짜고 손 뗐다.
7살 어린이는 기저귀를 가는 얼라를 보면 아직도 똥오줌 못 가리냐고 비웃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진짜 음악이 슈베르트든 뽕짝이든 내 알 바 아니다. 자네들은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는가?
'진짜'는 내게 곧 오초의 흥망이다.
대부분의 논쟁들이 특별시의 무딘 저작권 의식과 빠른 생활패턴 속에 담겨져서 식어간다. 아까 말했듯이 가품에 의한 충격은 더 이상 타박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논쟁을 거듭했기에 노련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더가 저건 구린내가 난다고 알람을 울린다. 그 더듬이 같은 판독 기능이 부침을 겪는다 할지라도 거시적으로 봤을때 우상향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구린내를 맡는 능력'
'통찰력'은 아니다. 꿰뚫어본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개념보다 높은 수준이다. 서너 수까지 내다보는 바둑기사들의 기술이 아닌, 당장 몸뚱아리를 둘러싼 구린내를 잘 맡는 개코같은 수준 정도로 치자. 그런 의미에서 '눈질' 쯤 되시겠다. 섬세하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정교하게 살피는 일과는 정반대다. 직관에 가깝지. 물론 돈오, 유레카보다 더 본능에 가까운 쪽이다.
이 눈질 덕분에 믿었던 친구에게 보증을 서준 뒤 빚더미에 깔리거나, 코인판에 눈이 돌아간 나머지, 가진 돈을 다 태운다든지, 월 200에 공과금 떼고 가끔 부모님 용돈 드리고 나면 거덜나는 벌이를 이어가는 친구의 재무를 관장해주겠다면서 으스대고 거시 경제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읊는다든지, 옥장판을 300개 사서 커미션 챙기려는 심보를 갖는다는 식의 도시괴담은 내 미래가 될 수 없다. 다행이다. 설령 백수로 남아도 그건 악수(惡手)가 아니다.
정말 아쉬운 건, 무언가에 극진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얼마 전까진 분명 있었는데.
내게 달린 더듬이가 분리불안 말티즈보다 더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켜져있으니 마음 놓고 무언가에 헌신하는 걸 경계한다.
마음 놓고 무언가를 만끽할 시대가 끝났다는게 둥지에서 어미새가 떨구는 모이만 낼름 먹는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제 막 둥지 밖으로 내딛는 내가 온 힘을 다해 '진짜' 라고 믿는 것에 헌신할 수 없지만, 자신과 가족, 소중한 사람들의 안녕을 위한 일이 눈질하는 것이라면 난 더 의심하고 살아야 한다.
참-거짓 논쟁의 뒤를 이어, 순수함을 더 이상 반추하지 못하고 곧장 다 변으로 보냈다는 죄책감에 꽤 오랜 시간 시달렸다.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내 젊음이 타들어갔다거나, 잃어버렸다고 표현했다. 이젠 젊음을 흘린다고 느낀다. 여유가 생기면 다시 주워 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여지를 남기며 눈질을 이어간다.
저번 주, 서울역 플랫폼에 변을 흘리며 가는 노숙자를 보며 분노했지만, 나도 똑같이 뭘 흘리며 사는구나 싶어 그 분노를 거둔다.
헨젤과 그레텔의 도시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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